직구인생 (直球人生) by artistY


Prologue


1986년 10월 12일. 센트럴리그 우승까지 1승 만을 남겨두고 있던 

히로시마는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 

야쿠르트와의 원정 경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1회에 나가시마(長島淸幸)의 만루 홈런이 터지는 등, 

시합은 완전히 히로시마의 페이스.

선발 투수인 히로시마의 에이스 키타벳부(北別府學)도 

쾌조의 투구를 보이며 8 대 3으로 리드하고 있던 상황에서 

9회 말 야쿠르트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때 더그아웃에서 키타벳부는 글러브를 챙겨주는 감독에게 말을 꺼냅니다.


'교체해 주십시오.'


의아해하는 아난(阿南)감독에게 설명하는 키타벳부.


'츠네를 헹가래 투수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감독.

부상에 시달리던 시즌들을 극복하고, 팔이 빠져라 던지면서도 피곤한 척 

한번 하지 않았던 츠다의 모습을 선수단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자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투수 14번, 츠다 츠네미'


장내 아나운서의 방송이 이어지자 관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타자를 질려버리게 할 정도로 윽박지르는 직구 승부.

몇 개인가 직구가 연달아 들어왔고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직구가 포수 미트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 불을 뿜는 직구는 외곽으로 크게 벗어나는 볼.

하지만 질려버린 주심은 엉겁결에 손을 들어버리고 맙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눈물을 흘리며 뛰어나온 포수 다쓰가와(達川光男)의 

품에 안긴 츠다는 꿈같은 86년 시즌을 마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비운의 선수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선수는 누구일까요?

프로야구 원년을 불태운 후 잦은 부상으로 

끝까지 원래의 실력을 찾지 못했던 불사조 박철순.

투타 겸업에 따른 혹사와 부상으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우리나라 첫 아이돌 스포츠 스타 박노준.

18승으로 신인왕을 따내고 화려한 경력을 막 시작하려는 참에 

교통사고로 인해 투수의 꿈을 접어야 했던 김건우.

앞으로 10년은 팀을 책임질 대들보로 여겨지다 

급작스러운 위암으로 사망한 김상진.

만개하는 듯하다가 당뇨라는 병마에 사로잡혀 

투병생활과 선수 생활을 겸임하고 있는 심성보.

이 외에도 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에서 비운의 선수를 들라면, 

사람들은 너무나 생생한 기억에 진저리를 치며 한 선수를 첫머리에 꼽습니다.

80년대 히로시마 카프의 마무리 투수, 츠다 츠네미(津田恒美)입니다.

일명 '불꽃의 스토퍼'(Stopper: 마무리 투수.)라 불리며 '오직 직구!'를 외친 츠다 선수.

93년 7월 20일 뇌종양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한 번만 더 공을 던지고 싶다!'라고 외치던 그런 선수가 바로 츠다였습니다.

사나이 츠다의 인생, 한번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려한 젊은 시절


츠다는 1960년 8월 1일, 야마구찌현山口縣 

신난요시(新南陽市) 와다(和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난요(南陽)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에서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가 전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학년이던 

77년 7월 21일, 고시엔(甲子園) 대회 지역 예선 1회전에서 

완전 시합(Perfect Game)을 달성하면서부터였습니다.

3학년이던 78년도에는 봄, 여름 고시엔 대회에 연속 출장하여 

에이스로 활약하며 관서(關西)의 에가와 스구루

(江川卓 1978년 드래프트 파동의 주인공. 요미우리의 에이스.)라고 불리며 

프로구단의 지목 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그는 조용한 성격의 아이였습니다.

공은 빠르지만 경기에만 출전하면 당황하여 

제 성적을 내지 못하여 새가슴이라고 불리기도 하던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3학년 고시엔 대회.

당시 우승후보로 불리던 난요공고는 에이스였던 츠다가 

별생각 없이 던진 단 한 번의 실투 결과로 2회전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후회한 츠다는 이때부터 '약한 마음은 최대의 적이다'라는 말을 

그의 좌우명으로 삼고 진정한 승부사로 거듭나기 시작합니다.

1점 차이의 긴박한 승부에도, 10점 이상 차이 나는 압도적인 승부에도 

변함없는 집중력을 보여주었던 그의 승부사 기질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졸업 후 교화(協和) 발효 사에 들어가 사회인 야구에서 활약하던 

그는 프로 팀의 구애에 시달리다 결국 81년도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고 

히로시마 카프에 의해 1차 지명으로 뽑히게 됩니다.

모든 구단이 노리던 강속구 파워피처를 손에 넣은 히로시마는 

미친 듯이 기뻐했고 구단 사상 최초로 신인왕을 

노려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키타벳부, 후쿠시(福士敬章 = 장명부), 

야마네(山根和夫), 이케다니(池谷公二郞), 오노(大野豊) 등 

5명의 10승대 선발진을 보유했던 히로시마였지만 

촉망받는 신인 츠다에게는 선발 한자리가 보장되었고 

츠다는 구단의 기대에 완벽하게 보답합니다.

무너져버린 후쿠시와 이케다니의 공백을 메워주며 

에이스 키타벳부에 이어 팀 내 다승 2위, 

11승 6패 방어율 3.88을 기록하며 구단 첫 신인왕을 따내는 데 성공합니다.

직구만을 고집하는 그의 승부 자세와 

불같은 투지는 순식간에 관중들을 사로잡았고, 

사람들은 그를 '츠네곤'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팬클럽을 결성하는 등 많은 사랑을 보냅니다.

히로시마 역사상 가장 화려한 첫해를 보낸 신인이었지요.


신인시절이 끝나고 2년 차가 되었지만 

그에게 그 흔하디 흔한 2년 차 징크스는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전반기 내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선보인 

그는 9승 3패 방어율 3.07이라는 화려한 성적을 보이며 

배터리인 다쓰가와와 함께 첫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여 우수선수상을 수상합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거둔 화려한 성공을 하늘이 질투했던 것일까요.

올스타 경기에서 호투한 다음부터 츠다는 

어깨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어깨 부상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리면서 그의 화려한 젊은 시절도 막이 내립니다.




악전고투


강속구 투수들의 경우 어깨 부상은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컨트롤보다는 스피드에 의존해 타자를 힘으로 누르는 파워피처들은 

어깨 부상 이후 공의 스피드가 떨어지면 타자들을 

상대할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스피드를 잃은 강속구 투수들이 그저 그런 투수가 되어 

쓸쓸히 야구판을 떠나게 되는 광경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84년 츠다가 3승 4패 1세이브 방어율 4.64에 그치는 

참담한 성적을 내자 많은 야구팬들과 평론가들은 

츠다도 이제는 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시즌 중, 그가 어깨 부상 이외에도 오른손 중지에 

혈액순환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투수 생명은 이제 끝이라고 단정 짓게 됩니다.

이상훈 선수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혈액순환장애는 

과도하게 팔을 사용하는 투수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병 중 하나로 

무리한 운동을 하면 특정 부위가 부어오르기 때문에 

한계 투구가 20~30개 정도로 제한이 되게 됩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치료법도 개발이 되어있고 

재기에 성공한 선수들도 있지만 당시에는 이병은 

투수 생명의 끝을 확정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때까지 혈액순환장애에 걸리고도 성공적으로 

투수 생활을 연장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즌 종료 후, 츠다는 커다란 결심을 하게 됩니다.

혈액순환장애를 수술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방면의 수술은 걸음마 단계였고 

일반인에 대한 성공 결과는 있었으나 

투수로서 수술을 받는 경우는 츠다가 세계 최초였습니다.

성공 가능성은 극도로 낮았으나 이렇게 투수 생활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도박을 걸어보겠다는 사나이 츠다는 과감히 승부수를 던집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결과가 투구에 미치는 영향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

물음표를 단 채 85년 시즌은 시작했습니다.

재기의 의욕에 불타 등 번호도 15번에서 14번으로 변경한 츠다는 

이름도 츠네자네(恒實)로 바꾸며 한 시즌을 불태울 각오를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적이었습니다.

2승 3패의 승률에 방어율은 6점 대를 훌쩍 뛰어넘는 최악의 성적이 나온 것입니다.

겨우 42이닝 만을 던지며 어깨가 꺾인 츠다.

통증은 여전했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강속구는 힘을 잃은 지 오래였습니다.

다른 수많은 유망주처럼, 그도 그렇게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화려한 부활


85년 겨울캠프, 더 이상 부진하면 바로 방출될지도 모른다는 

벼랑 끝에 놓인 츠다는 그의 야구 인생을 걸고 훈련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노력을 때늦은 짓이라며 무시했지만 

그의 노력을 눈여겨보던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를 이끌던 아난 감독이었습니다.


86년 개막전인 대 주니치전.

5 대 0으로 앞서가던 7회 초, 호투하던 에이스 

키타벳부 선수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시즌의 3대 이벤트에 들어가는 개막전이니 만큼, 

팀으로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고, 

그래서 츠다를 포함하여 경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당시 마무리 투수였던 고바야시(小林誠二) 선수가 등판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난 감독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바로 츠다였습니다.


놀람 반 감격 반으로 마운드에 오른 츠다는 

그의 야구인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에서 팔이 빠져라 역투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등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모든 사람들을 잠재우는 150km의 직구를 연신 찍어대며 

전업 마무리 투수로서의 첫 세이브를 기록합니다.

앞으로 너무나 많이 보게 될 장면의 서곡처럼 말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기회를 잡은 츠다의 역투는 전반기 내내 계속되었고 

츠다는 부상에서 돌아온 초보 마무리 투수답지 않게 

리그 정상급 실력을 보여주며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그의 전반기 성적은 3승 4패 12세이브.

28시합에 등판하여 단 6번의 구원 실패(Blown Save)만을 

기록하였고 방어율은 무려 0.93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직한 직구만을 찍어대는 

그의 모습은 히로시마 팬들에게는 흔들림 없는 청동 거인과도 같았고 

상대팀에게는 지옥의 수문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당시 츠다의 직구 위력에 대한 

두 가지 만화 같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힘으로 승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던 

츠다의 위력에 많은 타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던 

86년 9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인 

하라(原辰德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와 맞대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두를 놓고 반경기 차로 엎치락뒤치락하던 

히로시마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주1)


(주1)

이 해 히로시마는 거인과 우승을 놓고 마지막 사투를 벌이다 

10월 12일에야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다시 선두 자리를 뺏어서 우승을 위한 매직넘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날은 바로 전날인 23일.

24일 경기는 히로시마로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9회 2사 1루. 1점 차이니 만큼 장타 하나면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츠다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2구째를 던졌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구질은 직구.

조금 늦게 알아차린 하라의 한 템포 늦은 풀 스윙.

공은 배트 안쪽에 맞았고 3루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갑니다.

잽싸게 공을 잡은 3루수가 1루로 공을 던졌지만 

1루에는 당연히 뛰어와야 할 타자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타자였던 하라는 타석에서 뒹굴고 있었지요.

믿거나 말거나, 츠다의 공에 배트가 밀려 타자의 손목이 부러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데드볼이면 모를까, 투수의 공을 때린 타자, 그것도 장타력 최강의 4번 타자가 공을 때려 

손목이 부러졌다는 것은 정말로 만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85년도 우승 팀으로 '홈런 200발 타선'을 자랑하던 

한신의 클린업 트리오와 상대했을 때도 

진정 강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전설의 백스크린 3 연발의(주2) 주인공인 

바스(Randy Bass) – 가케후(掛布) – 오카다(岡田)와의 대결에서 

츠다는 단지 공 9개만으로 이닝을 끝내버립니다.

세명 모두 삼구 삼진으로 말입니다.

단지 직구만을 욱여넣어서 이루어낸 결과이기에 

사람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지요.


(주2)

백스크린 3 연발은 한신 타이거스 팬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대사건입니다.


1985년 4월 17일. 대 거인전 3연전 중 2회전.

3 대 1로 패색이 짙던 7회 말 공격에서 

거인의 에이스 마키하라의 공을 3번 타자 랜디 바스가 통타, 

백스크린(전광판)을 직격하는 시즌 1호 3점 역전 홈런을 때려냅니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가케후도 가볍게 풀 스윙, 

역시 백스크린을 직격하는 시즌 2호 솔로홈런.

마지막으로 오카다까지 백스크린을 직격하는 시즌 1호 솔로홈런을 때려버립니다.

한신 팬들은 너무나 흥분해서 거의 폭동 수준이었답니다.



전반기의 그의 성적은 매스컴들이 

온갖 수식어를 붙여대며 찬사를 해댈 정도였고, 

결국 그는 그의 생애 두 번째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됩니다.

첫 번째 올스타전에서 활약한 것처럼, 

큰 무대에서 더욱 빛나는 그의 실력은 

당시 세이부 라이온즈의 슈퍼루키 기요하라(淸原)를 삼진으로 잡으며 절정에 이릅니다.


통증이 없어졌다는 마음에 너무 무리를 한 탓 일가요?

후반기에 그는 피로에 쌓여 전반기만큼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부상 경험이 있는 초보 마무리에게는 

소화해내기 힘든 이닝 수였기 때문입니다.

전반기 방어율은 0.93이었지만 후반기 방어율은 3.52였습니다.

수호신이 흔들리게 되자 팀도 부진을 거듭하게 되고 결국 8월 3일, 

그때까지 아무도 넘보지 못하게 지켜오던 선두 자리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하지만 츠다는 역시 츠다였습니다.

계속되는 연투에도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은 채, 

그는 팀을 위해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그의 투구 덕인지 다시 정신을 차린 히로시마는 

9월 23일 선두 자리를 회복하고 시즌이 거의 끝나가던 10월 12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앞에서 나왔듯이, 당시 선발이었던 키타벳부는 

츠다를 헹가래 투수로 만들어주기 위해 자진 강판을 합니다.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올해의 끝은 지난 몇 년간 고생만 해온 츠다에게 맡기고 싶었습니다.

시즌 전반 팀을 혼자 이끌어가다시피 한 그의 힘이 없었다면, 

올해의 우승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인왕을 따낸 데뷔 시즌 이후 4년 만에 부상 없이 

한 시즌을 보낸 츠다에게는 '올해의 컴백상'(주3)이 수여됩니다.


(주3)

부상 등으로 제대로 성적을 올리지 못하다 다시 부활한 선수에게 주는 상.

삼성에서 뛰다 다이에로 돌아가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김일융 선수도 이 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해 센트럴리그를 우승한 히로시마는 

일본시리즈에서 아키야마(秋山)-기요하라의 'AK포'를 앞세운 

세이부 라이온즈와 맞붙게 됩니다.

첫 경기 2-2 무승부 이후 계속된 2-1, 7-4, 3-1의 3연승.

이긴 경기마다 모조리 등판하여 승리를 지켜낸 츠다에겐 

너무나도 장밋빛 미래가 보이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을까요.

제5차전에서 키타벳부를 구원한 츠다는 연장 12회 말, 

상대 투수 구도(工藤)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1-2 패배를 맞보게 됩니다.

6, 7차전을 연거푸 1-3으로 진 히로시마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일본시리즈 8차전에서 

2-3으로 역전패를 하면서 우승의 꿈을 접고 맙니다.

통한의 안타 하나로 무너지긴 했지만 

츠다의 공로는 모두가 인정하여 일본시리즈 우수선수로 뽑히게 됩니다.




불꽃의 스토퍼


87년 시즌도 주전 마무리로 꾸준한 성적을 보여준 츠다였지만, 

88년 시즌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무려 9패를 기록합니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그를 '사요나라의 츠다'라고 부르며 놀려대곤 했습니다.

89년 언제나 그를 믿어주었던 아난 감독이 물러나고 

한때의 동료였던 히로시마의 영원한 4번 타자 

야마모토 코지(山本浩二)가 감독으로 취임하자 

츠다의 자리도 위협을 받기 시작합니다.


츠다의 불안한 마무리를 걱정한 야마모토 감독은 

시즌 초에 더블 스토퍼 체제를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너진다면 츠다가 아니지요.

이러한 조치를 오히려 분발하는 계기로 삼은 츠다는 

그 어느 때보다 위력적인 공을 뿌려대며 부활합니다.

기합에 가득 찬 정면승부. 불을 뿜는 강속구.

팬들은 어느새 그를 ‘불꽃의 스토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해 츠다는 고대하던 구원왕 자리에 오릅니다.

12승 5패 28세이브.

무려 40세이브 포인트에 일본 기록인 12 연속 세이브, 

20이닝 연속 무실점까지 기록한 결과였지요.

그러나... 츠다의 영광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승부사 츠다


릴리프, 스토퍼 등의 용어로 표현되는 구원 투수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진압하는 특성 때문에 흔히 '소방수'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만약 자주 구원에 실패할 경우 '방화범'이라는 오명이 붙게 되곤 합니다.

하지만 츠다가 '불꽃의 스토퍼'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고 있는 

불에 더 강한 불꽃을 끼얹어 제압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투수들의 승부구는 대부분 변화구입니다.

현대에 들어 타자들의 타격 기술이 점점 향상되자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는 변화구는 투수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지요

사사키에게는 포크볼이 있었고 선동열에게는 슬라이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츠다에게는 직구 하나뿐이었습니다.

사내답게 싸우기 위해 유인구 하나 없이 

언제나 150km의 직구 승부만을 고집했던 츠다는 진정한 승부사였습니다.


그의 직구는 말 그대로 불을 뿜었고 타자들과 심판들은 

쉴 새 없이 꽂아대는 그의 직구에 질려버렸습니다.

인코스를 노리고 있는 타자들에게는 머리에 바짝 붙인 빈볼로 응징했고 

전 타석에 홈런을 때린 선수에겐 똑같은 코스의 직구로 삼진을 잡아내 보복했습니다.


츠다의 모토는 '칠 테면 쳐봐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츠다의 전성기 시절, 상대 팀들에서는

'컨디션 좋은 날 츠다의 공은 하느님도 칠 수 없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신인시절, 츠다는 포수였던 다쓰가와가 주문했던 

변화구를 던지다 끝내기 홈런을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시합 후 흐느끼는 츠다에게 다가간 다쓰가와는 말했습니다.


'이제 잔재주는 그만두자.

앞으로는 직구 하나만 가지고 결사적으로 한번 해보자'


이 말은 그 후 츠다의 야구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츠다의 통산 성적은 49승 90세이브, 방어율 3.31입니다.

선동열 선수가 일본에서 단 3년 만에 

90세이브가 넘는 기록을 세운 것과 비교하면 

그다지 눈에 띄는 기록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마무리로 뛴 햇수가 86년부터 89년까지 

단 4년뿐이라는 것과, 요즘처럼 투수 분업화가 

되어 있지 않은 시대의 기록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기록은 대단히 뛰어난 성적입니다.

그의 기록은 일본 프로야구 통산 16위에 올라가 있고, 

리스트에 있는 다른 투수들은 대부분 전업 마무리로 10년 가까이 뛴 선수들입니다.




고난의 시작


1990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히로시마의 팬들이 츠다에게 거는 기대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 같은 그의 모습에서 팬들은 힘을 얻었고, 

그의 불꽃같은 직구를 보며 어린이들은 

프로야구 선수가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당시 츠다를 우상으로 삼던 아이들 중 하나가 

세이부의 괴물 투수, 마쓰자카(松坂)였습니다.

그 해 드래프트 1번으로 들어온 거물 신인이자 

미래의 에이스, 사사오카(佐佐岡)도 츠다의 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하고 단 네 경기 만에, 

츠다는 오른쪽 어깨에 이상을 느끼고 강판당합니다.

그리고 부상이 상상외로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하곤 

본격적인 재활 과정에 들어가지만, 

재활 중인 8월에 다시 한번 인대를 손상해 

결국 90년 시즌 내 복귀는 실패했습니다.

츠다의 자리인 마무리에는 츠다를 동경하던 

신인 사사오카가 투입되어 전천후로 17세이브를 기록합니다.


츠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팬들은 실망했으나, 

그의 복귀를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츠다라면, 사나이 츠다라면, 이런 부상쯤은 

툭툭 털고 일어날 것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으니 말입니다.

'괴로울 때도 도망가지 않는다, 언제나 베스트로 맞선다.'라는 

그의 좌우명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프 시즌 동안, 츠다는 죽자 사자 재활에 매달렸고 

2월쯤에는 이미 부상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운명의 91년 시즌 직전, 팬들과 동료들, 

그리고 츠다 자신도 재기를 의심할 나위 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참으로 얄궂었습니다.






운명의 91년 시즌


91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히로시마의 미래는 장밋빛이었습니다.

키타벳부, 사사오카, 오노, 가와구치(川口)는 당대 최고 철벽 투수진의 근간이었고 

타격에서도 유격수 노무라(野村)를 선두로 에토(江藤), 마에다(前田), 

오가타 등의 젊은 피들이 은퇴한 카프의 대들보 들인 야마모토 고지와 

기누가사 사치오가 빠져나간 자리를 성공적으로 

메꾸어 주리라고 기대되고 있었습니다.(주1)

여기에 전년도 전력 외였던 츠다가 돌아온다면, 

6년 만의 우승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주1)

91년도 히로시마 카프의 투수진은 역대 카프의 투수진 중 

손꼽힐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입니다.

2년 차로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MVP, 사와무라상, 

투수 부문 베스트나인, 다승, 방어율 타이틀을 따낸 

사사오카 신지를 필두로 승률 타이틀의 키타벳부, 

구원 타이틀의 오노, 탈삼진 타이틀의 가와구치 등 

센트럴리그 투수 부문 타이틀을 카프 투수진이 독식했습니다.



장밋빛으로 가득 찬 91 시즌이 시작되었고, 

개막전부터 츠다는 투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점 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동점을 만들어주며 

1이닝을 던진 후 마운드에서 내려옵니다.

이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오랜만에 등판을 해서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합니다.

다음 경기에서는 수호신의 모습을 보여주겠지-하며 말입니다.


하지만 이틀 후 등판한 츠다는 결코 그 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 거인전, 키타벳부와 요시다의 팽팽한 투수전은 

7회에 가서야 균형이 깨지고 2-1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츠다가 등판합니다.

당연히 관중석에서는 이제 이겼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츠다는 그 탄성에 보답하지 못합니다.

사구와 안타를 연이어 맞은 츠다는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3실점하며 오노에게 공을 넘기고 패전투수가 됩니다.

벤치를 향한 츠다에게 야유와 비난이 쏟아지자 

츠다는 입술을 깨문 채 머리를 숙이고 벤치로 들어갑니다.


이날 츠다는, 자신의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전년도에는 부상당한 어깨 때문이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가 원하는 대로 공이 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병원에 가서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뇌종양, 그것도 이미 손을 쓰기 힘든 말기였습니다.


너무나도 쇼킹한 뉴스에 구단과 츠다의 아내 아키요는 경악했고, 

일단 츠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받게 하도록 하자는데 동의합니다.

병명을 모르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츠다는 그의 인생 처음으로 

'무섭다'라는 말을 연발하기 시작합니다.

대수술은 일단 성공적이었으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포함한 긴 투병생활을 시작합니다.






투병 생활


심한 두통으로 몸부림치던 츠다에게 더욱 두려웠던 것은, 

그 자신의 병명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그에게 해준 말은 수두염의 일종이라는 어중간한 답변뿐.

아무리 아내를 다그치고 의사에게 매달려도 그 이상의 답변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수두염 따위로는 이렇게 아플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병세는 악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재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재수술의 결과는 더욱 심한 통증이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통증에 미친 듯이 괴로워하던 츠다는 

3일이 지나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고 잠에서 깨어난 츠다는 

'무엇 때문에 나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 것인가'라고 외치며 

그의 아내 아키요의 품에 안겨, 생애 처음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너무나 괴로워하던 츠다를 보다 못한 그의 아내 아키요는 

식이 요법을 사용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주치의를 방문,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달합니다.


6월 12일, 마침내 츠다는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집에서 통원 치료와 식이 요법을 병행하며 치료를 해나갑니다.

불안에 휩싸인 츠다는 도대체 자신의 병명이 뭐냐며 아내를 다그쳤고, 

그의 아내 아키요는 2주일이 지난 뒤, 마침내 그의 병명을 알려주게 됩니다.


뇌종양, 불치의 병, 말기.


엄청난 쇼크를 받은 츠다는 '이제 나는 죽는 것인가?'라고 

뇌까리며 아이와 같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키요는 같이 눈물을 흘리며 충격을 받은 츠다를 격려합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에 감동을 받은 츠다는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때까지 그를 지탱해왔던 불굴의 투지로, 병마와 싸울 것을 다짐합니다.

결사적으로 식이 요법에 매달리던 츠다의 두통은 

가라앉는 듯했으나 7월 19일, 갑자기 상태가 급변합니다.


중태에 빠진 츠다는 병원에 입원합니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자, 식이요법의 효과가 

발휘되어서였는지 기적적인 회복을 보입니다.

9월 17일, 믿어지지 않게 도움 없이 혼자 앉게 된 그는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다음 날에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히로시마 카프가 우승이 결정된 날, 그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같이 싸운다, 츠다!


츠다의 병명이 알려진 후, 

히로시마 선수단은 초상집 분위기나 다름없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츠다의 존재는 단순한 마무리 투수 이상이었습니다.

선발투수 들은 그를 보며 7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을 했고, 

타자들은 그와 같은 팀이라는 것을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신인들은 그를 우러러보았으며 베테랑들은 그를 믿었습니다.

츠다가 투병 중이란 것을 알게 되자 팀원들은 그와 같이 싸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츠다의 빈자리에는 츠다와 제일 친한 투수였던 오노가 들어갔습니다.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된 오노는 히로시마 시민구장 불펜 내, 

츠다가 주로 서있던 자리에 플레이트를 걸어놓았고, 

등판할 시기가 되면 꼭 그 플레이트에 손을 대고 난 후에 경기에 나갔습니다.

츠다를 동경하던 사사오카는 엄청난 투지를 보이며 

사와무라상을 받아 그 해 최고의 투수가 되었습니다.

츠다와 어깨를 마주하며 던지던 키타벳부와 가와구치는 

선발진을 맡아가며 팀을 이끌어 나갔고, 

타선에서는 츠다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다쓰가와가 눈물을 흘리며 뛰고 있었습니다.


시즌 종반, 마침내 주니치를 따라잡은 

히로시마는 홈구장에서 역전 우승을 달성합니다.

감독의 헹가래를 끝낸 후, 그라운드에서 벌어진 우승 축하연에서 

다쓰가와는 눈물을 머금고 외칩니다.


'츠다... 해냈어!'


곧 모든 선수들이 다쓰가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고 

팀 전원은 하늘을 향해 손을 들며 츠다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분발해줘, 츠다!'


일본시리즈에서, 그 없이 세이부와 싸우고 있는 

히로시마를 보던 츠다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감독이나 코치에게 욕을 먹고, 

관중들에게 어떠한 야유와 비난을 받아도 좋으니,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마운드에 설 수 있으면 좋겠어.'




싸움의 끝


11월 6일, 히로시마 구단은 충격적인 발표를 합니다.


"히로시마 카프 구단은 마무리 투수 츠다 츠네미 선수를 방출합니다."


모든 스포츠 신문들은 다음날 1면 톱기사로 

불꽃의 마무리 투수의 은퇴를 발표했고 츠다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의 인생을 좌우한 오기와 투지가 불타올랐고, 

단순히 '살아남는다'였던 그의 목표는 

'연봉 따윈 필요 없다. 다시 한번 히로시마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고 싶다.'로 바뀌었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92년 새해가 되자, 

츠다는 마침내 그토록 그립던 공을 잡습니다.

그의 세 살 난 아들의 캐치볼 상대가 된 츠다는 공을 받게 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던져버립니다.

아들의 옆으로 날아간 것은, 놀라운 속도의 강속구였습니다.

벙쩌버린 아들, 경악한 츠다, 그리고 누구보다 기쁨에 찬 그의 아내 아키요.

이젠 정말 할 수 있다고 마음먹은 츠다는 본격적으로 트레이닝에 들어갑니다.


복귀를 목표로 트레이닝을 하던 츠다에게 이상이 생긴 것은 6월.

그의 말수가 감소하고, 얼굴이 고통에 차기 시작했습니다.

기억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8월에는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9월이 되자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10월에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로 7개월을 버텼으나 다음 해 5월 호흡정지.

7월 19일, 생명유지 장치에 힘입어 살아있던 

그에게 아내 아키요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여보, 이제 편해지셔도 돼요.

그동안 노력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7월 20일 오후 2시 45분.

츠다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년 32세였습니다.




그 후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사실이었을까요?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난 츠다를 보며 

다쓰가와와 오노를 비롯한 히로시마 팀원들은 오열했습니다.

팬들은 눈물을 흘렸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그런 선수가 떠나갔다는 것에 대해 야구계 전체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가 죽기 전인 93년 4월, 그의 고향이었던 신난요시는 

츠다를 신난요시 시민 영예상 1호로 발탁하고, 그를 기리기 위한 작업을 착수합니다.

시청 로비 한쪽에는 지금도 츠다 선수가 입고 있던 

유니폼과 글러브, 스파이크 등을 영구 보존하고 있습니다.

츠다의 모교였던 와다 중학교에서는 야마모토 고지 감독의 친필이 담긴 

'직구인생'이라는 기념비가 만들어졌습니다.





비운의 삶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울렸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 기억에 남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투병 당시 쓰던 일기를 모아서 출판한 

'최후의 스트라이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NHK에서는 '다시 한번 던지고 싶었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을 재 조명했습니다.

그의 7번째 기일 직후인 2000년 7월 28일에는 후지 TV에서 

'최후의 스트라이크 - 불꽃의 스토퍼 츠다 츠네미의 

사랑과 죽음을 응시한 직구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히로시마의 팬들은 아직도 츠다를 기억합니다.

히로시마 카프 게시판에 무명으로 이런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츠다의 14번이 영구 결번이 아닌 것은, 

천국에 올라간 츠다를 신격화하는 대신, 

그 영혼을 모두에게 계승하기 위해서입니다.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돔구장이 되지 않는 이유는, 

츠다가 천국에서 언제라도 시합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무리 투수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분야 중 

어느 면에서도 츠다는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직구 스피드에서는 스즈키보다 못했고 

공의 무거움에서는 야마구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천재성에는 에나츠를 능가하지 못했고 

우시지마처럼 다양한 변화구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실적으로는 가쿠 겐지에게 밀리고 기록에서는 사사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안정감에서는 선동열 뒤에 있고 전천후성으로는 오노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츠다에게는 이 모든 선수들을 능가했던 열정이 있었고 

그 누구와도 정면승부를 할 수 있던 배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떠한 다양한 변화구도 

제압할 수 있는 불꽃의 직구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야구 경기를 한다면, 

그리고 그 경기가 1점 차 9회 말 2사 만루까지 갔다면, 

전 망설임 없이 츠다를 선택할 것입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사키나 선동열을 믿어보는 것이 

더 성공 확률이 높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츠다라면, 다른 '투구 기계' 들이 아닌 '사나이 츠다' 라면, 

적어도 내 목숨을 한번 걸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에필로그


2000년 7월 20일.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는 카프의 홈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시구식을 준비하는 구단 직원들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고, 

벤치의 다쓰가와 감독과 카프 선수들의 눈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관중들을 향해 스피커에서는 

난데없이 선수 교체의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히로시마 카프 투수 교체입니다. 투수, 츠다. 등번호, 14'


경악하는 관중들.

츠다의 기일에 이 무슨 불경스러운 일인가라고 외치던 관중들의 눈에 

불펜에서 힘차게 뛰어나오는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의 빨간 카프 유니폼 등에는 분명 츠다.

14번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있었습니다.


상황을 짐작한 관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운드에 서있는 소년은 이제 열한 살이 된 츠다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늠름한 모습의 소년은 

멋진 와인드업을 한 후 포수의 글러브를 향해, 

아버지가 그토록 던지고 싶어 했던 강속구를 던졌습니다.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카프의 팬들은 믿고 있습니다.




타이틀

82 신인왕, 83 최고 승률(750), 89 최우수 구원(40sp)




[출처]
blog.naver.com/trecool1/100016694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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